각주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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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태준

회색빛 건물

태준은 잠을 잔 듯 만 듯 아침을 맞았다.

방 안에는 어제 마신 맥주 냄새와 젖은 수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샤워를 했다. 마르지 않은 물기에 추운 상하이의 공기가 더 빠르게 스며들었다. 승필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제 잘 잤어?"

"응." 태준은 그냥 대답했다. 사실 잘 잤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제 본 검은 건물이 떠올랐다. 높고 무거운 벽.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건물.

"오늘은 꿈과 희망의 나라, 디즈니랜드다." 경환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 디즈니랜드 가려고 유튜브로 공략집까지 찾아봤다." 승필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누가 더 제대로 준비했는지 겨루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입장하자마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놀이기구를 먼저 타야 하는지, 퍼레이드는 몇 시에 봐야 하는지.

태준은 잠깐 듣고 있다가 말했다.

"난 오늘 빠질게."

두 사람이 동시에 태준을 봤다.

"예약까지 다 해놨는데 갑자기 빠지면 어떡해?" 승필이의 목소리에 실망이 묻어 있었다.

태준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사진 찍을 만한 곳을 발견했어. 거길 가보고 싶어."

어젯밤 마주한 콘크리트 벽이 다시 떠올랐다. 검고 높고, 들어오라고도 밀어내지도 않던 건물. 경환이가 태준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도 오랜만이네. 승필이는 내가 데리고 놀 테니까."

승필이는 아직 조금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더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 사진 잘 찍어와라."

"응."

친구들이 나가자 방은 금방 조용해졌다. 경환이는 나가기 직전까지도 휴대폰으로 동선을 확인했고, 승필이는 "사진 찍어서 단톡에 남겨라"라는 말을 남겼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어제 마신 맥주 냄새와 젖은 수건 냄새만 남았다.

태준은 카메라 가방을 멨다.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젯밤에도 그냥 걷다가 닿은 곳이었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 골목은 어젯밤과 달랐다.

밤에는 검은 덩어리처럼 이어져 있던 벽들이 아침에는 제각각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문, 낮게 열린 창문. 어젯밤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있었다.

태준은 기억나는 방향으로 걸었다. 첫 번째 모퉁이에서 왼쪽. 빨간 조명이 있던 집을 지나서 오른쪽. 그다음에는 좁은 길.

그렇게 생각했는데 빨간 조명이 있던 집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만두를 찌는 작은 가게가 문을 열고 있었다. 김이 유리창을 하얗게 흐렸다.

태준은 잠시 멈췄다.

어젯밤에도 이 가게가 있었을까. 있었는데 못 본 걸까. 아니면 길을 잘못 든 걸까.

다시 걸었다.

전동 오토바이 한 대가 뒤에서 조용히 다가왔다. 소리가 거의 없었다. 태준은 뒤늦게 비켜섰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뭐라고 말했다. 화난 말 같지는 않았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골목은 자꾸 비슷해졌다. 낡은 벽, 낮은 창문, 빨래,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 한 골목을 지나면 비슷한 골목이 또 나왔다.

어제는 분명히 쉬웠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을 때는 도착했는데 다시 가려니 길을 잃고 있었다.

길가에 앉아 있던 노인이 태준을 보았다. 태준은 휴대폰 화면을 들어 보였다. 지도 위에 적힌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1933?"

노인은 화면을 보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왼쪽. 앞으로. 다시 오른쪽. 손목이 한 번, 두 번 꺾였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손짓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쎼쎼."

발음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앞을 봤다.

태준은 노인이 가리킨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더 좁아졌다. 벽과 벽 사이로 햇빛이 얇게 들어왔다. 밤에 어둠 때문에 하나로 보였던 길들이 아침에는 더 복잡하게 갈라져 있었다.

낮이 되면 모든 것이 더 잘 보일 줄 알았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많이 보인다고 길을 더 잘 아는 건 아니었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골목 끝이 조금 넓어졌다. 그리고 건물이 다시 나타났다.

1933老场坊.

어젯밤에는 검은 벽처럼 서 있던 건물이 아침에는 회색에 가까웠다. 콘크리트의 결이 보였다. 창문의 모양이 보였다. 안쪽으로 이어지는 통로와 위아래로 엇갈린 경사로도 보였다.

밤에는 그냥 높고 무거운 건물이었다. 아침에는 복잡한 몸을 가진 오래된 건물처럼 보였다.

무서움은 조금 줄어들었다. 대신 더 이상했다.

사람들이 입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여행객도 있었고 커피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들어가도 되는 곳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도 태준은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젯밤에는 들어가도 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아침이 되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들어간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곳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태준은 카메라를 꺼냈다. 렌즈를 통해 건물을 보았다. 화면 안에서도 건물은 말이 없었다. 셔터를 눌렀다. 찰칵. 작게 울렸다. 잘 찍혔는지는 보지 않았다.

그제야 길을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